도서평론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

김 호 준 2026. 2. 13. 11:55

 

김기빈 편저
[서울]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

개인적으로 나의 고향인 분당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 흥미로워 읽어보았는데, 독자분들도 '풀밭 분당'이 '천당 및 분당'으로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면 좋을 것 같다.

글을 쓰러 오는 길에 다리를 건너며 야탑 탄천 한가운데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두루미를 보았다. 거의 1미터를 넘을 것 같은 크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분당의 탄천이 깨끗한 이유 · · · '미래 세대에 꼭 전달되어야 할 책!'(내가 한 말이 아니고 책 앞에 붙어있는 문구다. 어떤 도서관 직원 붙여놓은 것 같다)의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내가 오는 길에 보았던 것은 백로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에는 신도시 개발 전 탄천의 백로무리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자연까지 보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분당이 엄청난 지능적 계획 아래 설계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의 주제는 개발이 아닌 역사기 때문에 역사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한강이남지역이었던 분당은 백제국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런 고고학적인 내용에는 크게 관심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 같아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보려고 한다.

'광주군에서 성남시로' 지금까지 분당지역의 역사는 광주군의 역사 속에 포함되었으나 광주대단지라는 과도기를 거쳐 성남시가 탄생되었고, 이에 따라 분당지역의 역사는 성남시의 역사로 그 자리가 바뀌어졌다고 한다. 성남출상소는 1913년 12월 광주군 군내면을 나누어 중부면을 신설하였는데, 중부면의 중앙에 남한산성이 있어 불편하였으므로 중부면 성남출장소를 만들어 단대, 상대원, 수진, 복정, 창곡, 탄리의 6개리를 빈리, 관할케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구 및 행정수요의 증가에 맞추어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승격되었고 다시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의 신도시 개발대상지로 선정(서울시내 무허가건물 일소대책에 의한 철거민 이주지)되면서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난동사건이 터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1971년 10월 14일 서울시의 주택단지 사업을 경기도가 인수하고 광주대단지를 성남단지로 고쳤으며, 정부가 서둘로 경기도 성남출상조를 승격 및 개소하고 중래의 중부면 6개 리 이외에 돌마, 낙생면 전 지역과 대왕면 9개 리를 여기에 편입시킴으로써 분당이 성남출장소에 포함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72년 7월 1일 성남출장소는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이어 1989년 정부는 분당지구 일대 540만 평에 10만 5천 호의 주택과 도시시설을 갖춘 인구 42만 명의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하였고, 이에 편입되는 지역은 돌마편의 분당, 수내, 서현, 정자, 이매, 야탑, 도촌(?), 여수(??), 율동의 9개동과 낙생면의 구매, 백현, 동원, 금곡, 삼평, 궁내동의 6개 동, 대왕면의 사송동 등 도합 16개 동이었다고 한다. 도촌이나 여수는 지금은 성남시 중원구에 속하기 때문에 초창기 계획 당시 분당지역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기야 지금도 분당구 야탑동과 경계를 두고 있는 지역이기는 하다.

아무튼 분당이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폐치 및 분합 때 새로 만들어진 조립식 합성지명이라고 한다. 그전에는 분당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고 이때 분점리와 당우동 등의 마음을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분점+당우)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화가 하나 있다. 원래 분당의 당 자는 한문 ( 당)자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6년 3월 통감정치를 시행하여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통감으로 부임시켰고 지방제도 개편이 단행되는데 이 때 자가 당나라 당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분명 조선시대 당우동이라는 이름은 명백이 집 당 자로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부 양안(1900년 제작)>에 의하면 광주군 돌마면의 분점리 등과 함께 당 (  )우동 토지에 관한 기록되어 있다.이는 분당의 당 자 표기가 집 당 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어느날 동박삭이 지금의 분당 탄천을 건너가는데 웬 사람이 냇물에 숯(목탄)을 빨고 있으므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숯을 빨면 하얗게 씻어진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이 내를 탄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탄천의 지류인 분당천의 옛 이름이 순내였는데 순내=숯내, 즉 숯 냄새가 나는 천이라는 것이다.(왜 강에서 숯을 씻어가지고...)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탄천은 한때 그 이름처럼 시커먼 물로 오염 되었었다. 전설의 '숯내'가 아니라 문명의 소산으로 인하여 '숯내'가 되었던 것이다. 탄천의 강물을 살리는 것은 곧 이 강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한강을 지키는 것과 같다. 탄천의 그 이름 때문이 아닌 현실 속 '숯내'가 되지 않도록 힘써 가꾸어야 할 강인 것 같다.

자 이제 분당동부터 시작한다.

분당동 지역은 옛부터 경기도 광주군과 통하던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거리를 이루었던 곳이며, 태재를 비롯하여 새마을고개, 봉적골고개 등이 모두 광주군 오포면과 통하였다고 한다. 분당동의 분당은 앞선 분당구의 명칭과 같다. 서초구에 양재동이 있지만 서초동도 있는 것과 같다. 너무 당연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서울의 당인리, 당주동의 당 자가 당나라 당 자였다는 사실은 어떤가. 분당의 당 자는 역사적으로 집 당 자 였지만 당인, 당주의 경우 역사적으로도 당나라 당 자를 사용해 왔었다. 이와 다르게 분당의 당 자는 역사적으로 집 당 자였지만 일제에 의해 당나라 당 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원래 분당동은 성남시 분당동이었지만 1989년 중원구청 관할을 거쳐 분당구 분당동이 되었으며 92년에 분당동에서 초림동, 서현동이 나누어졌고, 92년에는 서당동이 분동되었으며 동년 6월에 내정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분당동에는 태재 아래 한국지역난방공사의 분당복합화력 발전소(본사)가 있다. 나 또한 엄청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들을 보며 신현(경기 광주)에 있는 별장으로 가곤 했었다. 분당동 남대문거리 동쪽에 너구리 굴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위 밑 큰 굴에 너구리가 득실거려서 너구리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너구리굴이나 남대문거리는 지금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니 아쉬운 분들도 있을 것이다(?). 뱀도 많았다고 하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참고로 나는 수능을 분당동에서 보았다. 분당동 고급빌라촌이 내려다보이는 그곳(학교)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예상 외로 정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녹았다. 그리고 이 책에는 새마을고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궁금한 분들은 직접 보시고 내가 직접 겪은 생생한 역사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원래 서현도서관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장 이름은 '새마을 연수원 입구'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정류장 이름이 '양현보도 육교'로 변경되었다. 서현고등학교 재학 시절 서현도서관에 다닐 때마다 듣던 '이번 정류장은... 새마을 연수원 입구 입니다'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서현동에는 새마을운동 중앙연수원이 있다. 분당동의 태재고개 동북쪽에 있는 고개인 새마을고개는 분당에서 광주 신현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새말고개 또는 신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전에 분당 주민들이 광주 경안장을 보러 다닐 때 이 고개를 이용하였으나 1937년 태재고개가 확장되면서 지금은 별로 이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태재고개는 높이 약 180m의 분당 지역 중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 이 고개는 원래 서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으로 우마차나 보행자가 간신히 다니던 고개였으나, 1937년경 돌마면장이 주선하여 고개길을 닦았고 1985년 경에 처음으로 포장이 되었다. 태재는 글자 그대로 큰 고개라는 의미로 조선조 중엽부터 한양과 통하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부른 이름이라고 한다. 고개 마루턱에는 고려 말의 문신이자 충신이셨던 상촌 김자수(자는 순중)선생님의 묘와 묘비가 세워져 있다. 자랑스러운 경주 김씨 계림부셨던 상촌께서는 대사성 및 좌상시 등을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이 형조판서에 제수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할 때 함께 죽어야 마땅하거늘 지금 살아서 누를 보기에 이르렀도다.

나는 평생을 충과 효로써 닦아왔다. 이제 만일 신의를 저버린다면 무슨 면목으로 군과 부를 지하에서 뵈우랴.

나는 스스로 죽을 바가 있노라

하고 말한 후, 이곳 태재에 이르러 자손들에게 유명하기를,

내 이제 죽으리라/이는 오직 스스로의 신절을 다할 따름이다.

내 여기서 죽겠으니/여기에 묻고/삼가 묘도의 문자를 남기지 말라

하셨다고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절명사를 지은 후 자결해 후손들이 이곳에 장사를 지냈다.

평생의 충효 뜻을/오늘 뉘 있어 알아 줄고

한번 죽어가면/내 한도 풀리리니

구천에 가면야/아는 이가 있겠지.

본인 김호준은 경주 김씨 계림

또 태재의 서남쪽 1km 지점에는 '이 생명 다 하도록'의 실제 주인공인 주몽 김기인 선생님의 묘가 있다.

다음으로 수내. 이름은 이곳의 숲안 마을에서 비롯되었는데, 숲 또는 늪을 뜻하는 수 자와 안 내자를 취했다고 한다. 여기서 수 자는 늪지대의 얕은 곳 무성하게 이루어진 덤불을 뜻하는 글자이므로, 그전 분당천변의 숲이 무성한 마을을 뜻하는 숲안 이라는 이름을 한자화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종전의 수내동이 탄천의 동쪽에 위치하였고, 탄천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 이며 이 지역에서도 숯내로 통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분당천(탄천의 지류)을 이 지역(숲안의 역말 등)에서 수내라 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분당천=수내, 탄천=숯내의 관련설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수내 또한 광주군 돌마면에 속하였으며 중원구 관할이 되었다가 지금의 수내가 되었다고 한다. 또 수내에는 성남시 공동묘지가 있는데 수내동 동국대 한방병원 부군에 있으며 1970년대에 성남시에서 설치한 집단 묘역이다. 또 수내에는 역말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과거 역말 이었던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적혀있으니 생략해 주겠다. 또 신현의 경계가 되는 산이 형제봉은 수내에 포함되어 있는데 형제봉은 두 봉오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지금과 같이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복잡한 초림... 지금의 수내역이 원래는 초림역이었는데, 수내가 초림을 흡수합병해 버렸다. 개인적으로 수내보다는 초림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고 강력해 보이지만 초림의 역사는 다시 수내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다시라고 한 것은 원래 초림이 수내에서 분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사실 초림은 크기부터가 작기는 했다. 분당구청과 분당고등학교 외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시설이 없었으며 이마저도 수내에 통합되어버렸다.

그다음 내정동. 내정동은 지금 동의 지위를 상실하였지만 내정로 등 그 이름이 도로명 등에 남아있다. 필자는 수내동+정자동의 합성짐영인 내정동보다도 옛 이름과 정자를 살려서 숲정동(숲안+정자동)이나 수정동 같은 이름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조선 후기에 어떤 이가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 숲을 가꾸었는데, 그 숲의 안쪽 마을이므로 숲안 이라고 불렀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정동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동이 되었다.

정자동. 부근에 숲이 많았던 만큼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정자도 많았다. 그래서 정자동이다. 너무 간단한가? 그러나 지금의 학원가와 빌딩 조성으로 인한 환경오염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은 듯 싶다. 원래 자연이 우거졌던 만큼 지금도 정자에 가보면 탄천이나 숲의 규모도 크다. 아무튼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치욕을 부끄럽게 여긴 성종의 자손이 이곳에 낙향하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정자는 옛 사람들이 자연에 귀의하여 맑고 깨끗한 삼천에 심신을 씻어내는 한편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떠나 있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자는 어떤가? 혼탁의 정수, 결정체다. 정자는 산이 수려했고 물이 맑았으며 전망이 탁 트였었다. 앉아서 쉬곤 하는 정자가 있기에 딱 알맞았던 곳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정자 또한 조선시대 광주군 돌마면에서 중원구 정자동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정자의 탄천 위에 있는 백현교의 백현은 우리 말의 '잣고개'를 한자식으로 훈역한 것이라고 한다.

불정동도 지금은 사라졌다. 불곡산에서 불 자와 정자동에서 정자를 취하여 만들었던 이름의 동이었는데, 불 은 불교와 관련된 음역이기는 하지만 불곡산의 불이 꼭 불교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좀 복잡하다. 이 불정동의 아래쪽은 현재 정자동이고 위쪽은 분당동으로 확인되는데, 정자동에는 이 책의 집필을 주도한 한국토지공사가 있다. 또 한국통신공사(KT)도 있으며, 분당동에는 얼마 전 과학고등학교로 전환된 분당중앙고교도 있다. 한 개의 동에 있던 세 기관들이 지금은 서로 나뉘어진 것이다.

동쪽으로 광주 신현과 접하고 있는 서현. 이곳에 있던 마을명칭인 돈서촌과 양현이라는 두 마을 이름을 따서 서현이라고 하였다. 돈서촌의 경우, 어느 선비가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며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고 한다. 또 서현동에 통합된 율동은 그전에 율리라고 부르던 곳으로 유명한 밤의 생산지였다고 한다. 얼마 전 서현동에 거주하고 계시는 외조모님께서 황새울은 왜 황새울인지 여쭤보셨던 것 같다. 황새는 우리 말의 크다라는 뜻의 '한'이 황으로 변해 황새=큰 새가 된 것이다. 그전에 황새의 서식처였다고 한다. 또 서현에는 분당 최고 명문인 서현고등학교가 있다.

줄기찬 검당산/푸른정기 밭고서/서현고 상아탑이 우뚝 솟았네/학문 열기 샘솟는/진리의 전당

진리의 전당! 이 자리를 통해 서현고등학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은 이매동이다. 옛날 탄천변 구렛들에 물막이 방죽이 있어, 주민들이 이곳에서 천렵을 즐기다가 한 아름되는 큰 물고기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그 물고기는 천년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였다. 이무기가 마을 주민들 꿈에 나타나서 "저주를 받으리라"하며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내고 사라졌고 저주를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상의한 후 이무기의 위령 승천제를 구렛들에서 지냈는데 이때 제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다시 그날 밤 주민들 꿈에 이무기의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며 그후 승천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그루의 매화... 그러나 진주 유씨 세보 에는 임의곡으로, 임의술로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이매동의 최고 명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제일프라자'다. 이름부터 '제일'이다. 제일프라자는 입지면에서 교통, 시설, 접근성 등이 완벽한 건물이다(입주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야탑에 위치한 나의 모교 돌마초등학교가 원래 이매동에 있었다고 한다. 1934년에 설립되어 긴 역사를 지닌 돌마초등학교는 1950년 6.25전쟁으로 교사가 불타자 두 개의 학교로 나누어 지금의 야탑 돌마초, 그리고 분당초등학교가 되었다.

성남의 중심, 야탑동은 개인적으로 나의 고향이다. 분당차병원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을 야탑에서 살고 있다. 모교인 하탑중학교와 성남시 상수도사업소, 뉴코아 등이 있다. 야탑은 오야소동의 야 자와 상탑, 중탑의 탑 자를 취하여 만들어졌다. 오야소에는 오동나무가 많았었는데 이에 오야소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책에 오류가 있다. 상희공원의 이름 유래를 추측한 부분인데 상희공원은 이상희 대위께서 전투기를 몰던 중 기체 이상으로 추락하게 되자 주민들을 생각하여 빈 공터로 추락시켰던 것이었고, 그곳이 지금의 상희공원이다. 이 유래는 꽤나 오래된 것이며 유명한데 이 책에는 상희공원이라고 부르게 된 내력이 확실하지 않다고 쓰여 있다. 어렸을 적에 상희공원에 세워져 있는 기념탐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기억난다.

최첨단 판교동의 이름 유래는 너더리 마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너더리는 널다리가 변한 말로 보고 있으며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널 판 자와 다리 교 자를 취하여 판교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옛날 이 마을의 운중천 위에 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운중동 알짜배기 땅에 관심 있으신 분은 연락부탁드립니다) 분당구 중 상당히 서쪽에 위치한 판교까지도 그전에는 광주군 낙생면이었다고 하니 광주군의 어마어마했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평동에는 늙고 병든 사람을 산 채로 묘실에 옮겨 두었다가 죽으면 매장했던 고려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조성한 규모가 큰 토분을 고려장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 곳에 고려장에 사용하였던 돌무더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판교에는 낙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학교들이 있는데 낙생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가 남한산성에 포위된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북상하였다가 판교 남쪽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자, 임금이 성을 나와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성이 떨어진다'는 뜻의 낙성이 낙생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외의 설도 있다고 한다.

운중이라는 이름은 산운리와 중산운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어서 운중동이라고 불렀다는 풍류스러운 설도 있다고 한다. 판교와 접하고 있어 굉장히 부동산 가치가 높은 곳이다. 서울외각순환고속도로가 운중동을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자 이렇게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의 주요 내용을 좀 길게 소개해 보았다. 오랜 역사와 가치, 전통 속에서 분당의 '아름다운 땅이름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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